상인의 도시, 암스테르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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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www.holland.com/global/tourism/holland-stories/golden-age/dordrecht-cradle-of-the-golden-age.htm
출처 www.holland.com/global/tourism/holland-stories/golden-age/dordrecht-cradle-of-the-golden-age.htm
전통적으로 상업과 자본주의가 발달했던 암스테르담. 그 흔적은 현재까지도 이곳 저곳에 남아 있다. 상인의 도시로서의 정체성을 만들어 낸 암스테르담의 역사를 따라가는 여행을 시작해보자.
무엇이든 가능한 시대
네덜란드의 황금기
17세기 네덜란드는 황금시대였다. 스페인의 지배에서 독립해 종교 자유를 확립하고 무역을 통해 부를 확장했다. 1602년 암스테르담에 동인도 회사가 설립되면서 세계 해상무역을 주도하는 무역 중심지가 되었다. 인도네시아와 인도, 스리랑카에서 향신료와 향락용품이 들어오고 세계 최초의 증권거래소가 생겼다. 세상의 모든 물건이 네덜란드를 통해 들어온다고 해서 유럽의 관문, 유럽의 창고라는 별명도 생겼다. 상인과 지식인들이 부유해지자 예술과 과학이 꽃피웠다. 무역, 상업, 예술이 하나 된 찬란한 황금기를 맞이한 것이다.
종교화 No! 우린 돈 되는 그림만 그려요.
암스테르담과 상업 미술
중세 이래 오랫동안 무역의 중심지였던 암스테르담에 막대한 부가 집중되었다. 부유한 상인계층이 통치권을 장악했고, 자본주의가 대세였다. 신화 속 인물보다 상인의 초상화, 종교화보다 부호의 범선이 힘차게 바다로 나가는 풍경화가 더 잘 팔렸다. 왕가나 성경의 내용이 많은 프랑스나 스페인의 미술관과 달리 암스테르담 미술관에는 풍요를 자랑할 수 있는 정물화, 풍경화, 초상화로 채워져 있다.
더치 페이의 원조는 네덜란드
더치 페이
네덜란드 황금기의 문을 닫은 것은 영국이다. 세계 무역의 패권을 차지하기 위해 영국과 여러 차례 전쟁을 치르는데 이로 인해 국력이 약해졌다. 영국인은 네덜란드인을 비하해 구두쇠에 이익만 생각한다며 ‘더치 페이’라 불렀다. 네덜란드인은 종교 개혁 후 개신교를 받아들여 절제와 실리를 중요하게 여겼다. 상업이 발달해 돈을 다루는데 엄격한데다 소중히 여기다 보니 검소한 편이다.
무역의 선구자
동인도 회사
동인도 회사는 동양의 신기한 물건을 사 유럽에 되파는 중계무역회사이자 최초의 주식회사다. 17세기 초 영국·프랑스·네덜란드 등이 자국에서 동양에 대한 무역권을 부여 받아 동인도에 설립한 무역회사를 통칭한다. 포르투갈 대항해시대의 성공을 지켜본 이들은 미리 투자자들에게 돈을 거둬 커다란 배를 만들었고, 중계무역으로 돈을 벌면 그 이익을 나눴다. 인도의 후추 무역이 대박 나자 다른 무역회사들이 우후죽순으로 늘어났고 그 결과 경쟁으로 판매가격이 떨어졌다. 이에 무역회사들을 하나로 결집한 동인도회사를 설립하게 되었고 독점무역이 시작되었다.
하멜 표류기가 임금을 청구하기 위한 보고서?
하멜 표류기
헨드릭 하멜은 동인도 회사 인도네시아 지점의 서기였다. 1653년 일본 나가사키로 가던 중 폭풍우를 만나 제주도에 표류한다. 제주 포졸에게 구조되어 한양으로 압송된 하멜 일행은 경복궁 앞에서 무릎을 꿇고 왕을 알현한다. 그의 통역관은 그보다 20년 전 우리나라에 온 최초의 네덜란드인 얀 얀스 벨테브레, 바로 한국으로 귀화한 박연이다.
그를 통해 조선의 무기 개발에 힘쓰게 되었으나 탈출을 시도하다 전라도 강진으로 유배를 떠난다. 때마침 기근이 들어 고초를 겪던 일행은 다시 탈출을 감행하고 일부만 성공해 13년의 조선 생활을 마친다. 네덜란드에 도착한 하멜은 남은 일행을 각국 간의 교섭으로 데려왔다. 이후 동인도회사에 체불된 임금을 청구하기 위해 표류기를 적었고, 책으로 발간된 후 베스트셀러가 되어 오랫동안 행복하게 잘 살았다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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