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생이 되면 다 남자친구가 생기고 살이 빠지는 줄 알았다. 유럽 배낭여행도 누구나 다 가는 건 줄 알았다.
환상이 깨지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꼭 유럽 여행이 아니더라도 MT, 미팅, 동아리, 수업과 과제 등. 대학생이 해야 할 일은 넘쳤고, 그렇게 4년이 흘렀다.
결국 첫 유럽 여행을 가게 된 건 졸업 이후. 여전히 나는 가난한 20대였고, 수중에는 오백만 원이 없었지만, 벨기에에서 유학 중인 친구 하나 믿고 냅다 비행기표를 질렀다.
브뤼셀 인, 파리 아웃의 심플한 일정. 일반적인 유럽 여행이었다면 하루 이틀 스치고 넘어갔을 벨기에에서만 거의 한 달을 머물렀다.
나의 첫 번째 유럽 여행이었다.
첫 유럽 여행의 설렘
그리고 실패들
처음은 늘 설렌다. 그리고 어설프다. 내 첫 유럽 여행도 그랬다. 준비가 부족해서 더 헤맸다. 사실, 뭘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조차 잘 몰랐던 것 같다.
최저가 비행의 악몽
가난한 20대의 여행. 하룻밤쯤이야, 하고 한 푼이라도 아끼려 17시간 모스크바 공항을 경유하는 항공권을 샀다. 몸을 누일 만한 벤치조차 없을 거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극한의 피로에 시차가 더해진 채로 브뤼셀에 도착했고, 마중 나온 친구 집에 도착하자마자 꼴깍 잠들었다. (지금 생각해도 불쌍하다.ㅠㅠ)
30인치 캐리어가 정말 필요했어?
현지에 도착해서도 실수 연발이었다. 30인치도 넘는 대형 캐리어를 가져간 걸 하루 만에 후회했다. 혼자서는 제대로 들어 올리기도 힘들었다.
사실상 필요하지도 않은 물건들을, 가방 크기에 맞춰 주먹구구로 집어넣었다. 짐 싸기 요령이 너무 없었다. 나중에 파리에 갔을 때는 지하철을 탈 때마다 울고 싶었다. 모든 전철역에 엘리베이터가 설치된 서울이 그리워질 지경이었다.
우울한 날씨는 덤
겨울의 서유럽은 우울하다. 기온 자체는 한국보다 높지만, 하루가 멀다 하고 비가 내린다. 나는 우울해서 자꾸 맥주를 마셨다. (핑계입니다.) 입장료 없는 동네 클럽에서 스텔라 아르투아가 고작 2유로였으니까. (다시 가고 싶군요.)
겨울이라 문을 닫는 관광지도 많았다. 가장 아쉬웠던 건 브뤼헤의 보트 투어. 동절기에는 운영하지 않아 해 보지 못했다. 비수기가 괜히 비수기인 게 아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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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브뤼셀 여행은
이렇게 하고 싶다
패기 넘치는 여정이었지만, 여행의 기술이 부족했던 탓에 아쉬움이 남았다. 지나고 나니 다 추억이 되었지만, 덜 힘들고 더 즐거운 여행이었다면 더더욱 아름다운 추억이 되었을 것 같다.
이러한 이유로 나는 다시 브뤼셀에 가고 싶다. 지난날의 고생 위에 행복을 덧칠해 추억을 두 배로 쌓고 싶다. 두 번째 유럽 여행은 한결 노련하게, 보다 여유 있게 즐기고 싶다.
최저가보다는
가성비, 가심비 추구하기
어떻게 하면 한 푼이라도 경비를 아낄 수 있을지 고민하던 20대 때와 달리, 어떻게 하면 더 풍성하고 기억에 남는 여행을 할 수 있을지 고민하겠다.
단돈 5만 원, 10만 원을 아끼려고 공항 노숙을 자처하는 바보짓은 그만두겠다. 감자튀김과 샌드위치 대신, 근사한 미슐랭 스타 레스토랑도 한두 곳쯤 가볼 것이다.
짐은 감당할 수 있을 만큼만
짐은 적을수록 좋다. 첫 유럽 여행 이후, 차곡차곡 짐 싸기 요령을 익혀 왔다. 다 떨어져 가는 낡은 티셔츠가 있다면 가져가서 잠옷으로 입다가 버리고 온다. 속옷이나 양말도 마찬가지다.
20인치 기내용 캐리어에 간단한 옷가지만 챙겨서 떠나고 싶다. 그러려면 옷차림이 가벼운 여름 여행이 좋겠다. 막상 떠나 보면, 필요한 건 그다지 많지 않다. 옷이나 생필품은 현지에서도 얼마든지 구할 수 있으니까.
화창한 계절의 브뤼셀 만나기
겨울의 브뤼셀 말고, 다른 계절의 브뤼셀을 만나고 싶다. 한국보다 선선한 브뤼셀의 어느 여름날, 길어진 해와 파란 하늘을 만끽하며 늦게까지 유럽의 거리를 걷고 싶다.
그리고 이전엔 가보지 못했던 장소들도 꼭 찾아가겠다. 여름 한 달만 개방하는 브뤼셀 왕궁도 가보고, 브뤼헤의 운하를 따라 보트 투어도 즐길 것이다. 티켓팅에 성공할 수만 있다면, 세계 최대의 EDM 페스티벌인 투머로우 랜드도 가보고 싶다. 여름의 브뤼셀이라면 가능한 일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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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의 브뤼셀에서만 볼 수 있는 하늘이 있다.
결국 여행은
행복하기 위해 가는 것
과거의 서툰 여행을 부정하고 싶지는 않다.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의미가 있는 법. 바보 같은 실수들을 통해 배운 바도 많다.
하지만 그런 실수들을 반복하고 싶지도 않다. 첫 번째 여행과 두 번째 여행은 달라야 한다. 20대에게는 20대의 여행이, 30대에게는 30대의 여행이 있다. 체력은 예전만 못하겠지만 주머니는 더 든든해졌다. 취향과 안목도 확고해졌다.
공항 노숙 대신 깨끗한 호텔에서 자고, 밤새워 맥주를 마시는 대신 미술관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리라. 워킹 투어에 참가해 그랑플라스의 역사적 건축물들을 자세히 살펴보리라. 값비싼 명품 초콜릿도 브랜드별로 맛보며 품평을 해보리라.
두 번째 브뤼셀 여행, 언제 갈 수 있을까?
많은 이의 여행이 기약 없게 된 요즘이다. 여행이 미뤄지는 만큼, 나는 더 오래 꿈꿀 것이다. 꿈꾸는 건 자유고, 공짜고, 바이러스도 퍼뜨리지 않으니까. 오래 꿈꾼 만큼 더욱 풍성한 여행이 되기를 기대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