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의 3대 화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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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commons.wikimedia.org/wiki/File:Egon_Schiele_-_Self-Portrait_with_Physalis_-_Google_Art_Project.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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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을 여행하는 또 다른 묘미는 세계적인 화가 3인의 발자취를 만나볼 수 있는 것이다. 오스트리아를 대표하는 19세기말 위대한 화가들의 작품에 푹 빠져보자. 그들의 열정적인 삶은 여전히 현대인에게 깊은 감동을 불러일으킨다. 예술의 도시 빈에서 그 감동을 직접 느껴보자.
표현주의, 분리파, 화려한 에로틱함의 상징
구스타프 클림트 (1862-1918)
빈에서 활동한 대표적인 화가로 사랑, 성, 죽음 등을 화려한 무늬와 색을 통해 강조했다. 빈 교외 지역에서 태어난 이후, 빈 증권시장 붕괴가 그의 가족을 가난 속으로 밀어 넣었다. 빈곤에 허덕였지만 데생 솜씨가 뛰어나 1876년 친척의 도움으로 빈 응용미술학교에 들어가 미술가로서의 길에 들어서게 됐다. 1892년 아버지와 동생이 죽고, 이후 1915년 어머니까지 사망에 이르렀다. 그는 평생 독신으로 살며 가족을 보살폈지만 14명이나 되는 사생아들을 낳았다. 그는 살아생전 많은 명성을 누렸으며, 1890년 빈 구 국립극장 실내 장식 작업으로 황제 대상을 수상하는 등의 업적을 남기기도 했다. 가족력이었던 뇌출혈을 걱정했지만 스페인 독감으로 사망하게 되었다. 화가 클림트에 대해 더 궁금하다면 클림트 빌라에 방문해보자.
구스타프 클림트의 대표 작품
급진적 표현주의, 강렬한 삶을 산 요절한 화가
에곤 실레 (1890-1918)
오스트리아의 대표적인 표현주의 화가로 꼽힌다. 초기에 구스타프 클림트의 영향을 받았지만, 점차 자신만의 독창적인 세계를 화폭에 담기 시작했다. 인간 실존에 대한 고통, 의심, 불안 등을 왜곡된 인간의 육체로 표현했다. 16살에 빈 미술 아카데미에 들어갔지만, 그곳의 인습적인 교육에 불만을 품고 그만두게 된다. 이후 신미술가협회를 창립하고 여인들의 누드화를 생생하게 드로잉하기 시작, 미성년자들을 모델로 삼은 누드화 때문에 결국 1912년 유치장에 들어가기도 했다. 1915년 에디트 하름스과 결혼 후 생활에 안정을 찾게 된다. 빈 분리파에서 성공하기도 하고, 클림트 자리를 이어받았을 정도로 승승장구하기도 했다. 당시 아내 에디트는 출산을 앞두고 있었는데 이때 ‘가족’이라는 작품을 완성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아내와 뱃속 아기는 스페인 독감으로 사망하고 만다. 슬픔을 이기지 못한 실레도 3일 후 숨을 거두었다.
에곤 실레의 대표 작품
표현주의, 심리적 초상화의 대가
오스카 코코슈카 (1886-1980)
오스트리아 페힐라른에서 태어나 1905년 빈 미술공예학교에서 회화를 공부했다. 구스타프 클림트와 아르누보 영향을 받았다. 빈의 표현주의 운동가로서 내면의 심리를 표현하는 독특한 표현양식을 선보였다. 극작가, 시인 등으로도 활동하며 희곡 ‘살인자, 여인들의 희망’이라는 작품을 발표해 표현주의 연극의 창시자라는 칭호를 얻었다. 현실적인 세계를 바탕으로 삼으면서도 실제적인 묘사를 지양했으며, 굴곡이 심한 선과 차갑고 어두운 색채, 거친 붓 터치 등으로 작품을 표현했다. 초상화도 마찬가지로 사실적인 표현보다는 심리적인 측면에서 접근했다. 제1차 세계대전에 오스트리아 기병에 자원입대해 크게 다친 후, 드레스덴으로 이주해 교수로 활동하기도 했다. 1931년에는 히틀러의 탄압을 피해 프라하로 이주했다. 1938년 영국 망명길에 올랐고, 1941년에 올다 팔코프스카와 결혼한 후 5년 후 영국 시민권을 획득했다. 1953년에는 스위스에 정착해 아름다운 풍경화를 남겼으며 스위스에서 94세에 세상을 떠났다.
오스카 코코슈카의 대표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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