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시가지를 대표하는 바츨라프 광장은 프라하 국립 박물관부터 뮤스텍 광장까지 이어지는 긴 대로로, 길이 750m, 너비 약 60m에 달한다. 지금은 문화와 상업의 중심지이지만 치열했던 현대사를 온몸으로 겪어낸 곳이기도 하다. 프라하 관광 필수 코스인 바츨라프 광장, 알고 방문하면 더욱더 감동적이다.
유럽 최초의 계획도시
14세기, 구시가지가 포화 상태에 이르게 되자 카를 4세는 유럽 최초로 도시 계획에 따른 새로운 시가지를 만들 것을 명하였다. 마시장과 우시장 등의 가축 시장과 건초 시장이 주를 이르던 이 지역은 19세기에 들어서면서 아르누보 양식의 건물들이 늘어서 있는, 프라하에서 가장 번화한 상업 지구로 바뀌었다. 프라하의 미래를 엿볼 수 있는, 신시가지를 대표하는 곳으로 현재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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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의 꽃을 피우다
이야기는 체코가 아직 분리되기 전, 그러니까 ‘체코슬로바키아’로 불리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1960년대 공산주의 국가였던 체코슬로바키아에서는 국민들의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 대단했다. 체코슬로바키아의 지식층을 중심으로 조직적인 운동이 시작되어 1968년 민주화 운동이 절정에 이르렀다. 매일같이 수만 명의 인파가 집회를 연 곳이 바로 이곳, 신시가지의 중심인 바츨라프 광장이다.
관람 포인트
국립 박물관 계단에 오르면 밀란 쿤테라가 이 광장을 배경으로 쓴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생각나고, 그리고 영화 ‘프라하의 봄’이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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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 양옆의 길이 다른 이유
1968년, 체코인들의 자유, 인권, 민주를 향한 외침인 ‘프라하의 봄’이 이 광장에서 시작되었다. 광장에서 바츨라프 동상을 등지고 바라보면 오른쪽은 '아스팔트 길'이고 왼쪽은 '돌길'이다. 당시 바르샤바 조약 군의 탱크가 지나간 돌길이 산산이 부서졌고, 시민들은 그날을 기억하기 위해 길을 그대로 놔두었다. 시민들의 염원은 구소련의 탱크에 무참히 짓밟혔고 결국 ‘프라하의 봄'은 오지 않았다.
관람 포인트
하나의 커다란 건축 박람회 같은 다양한 양식의 건물들이 대로의 양옆으로 길게 연이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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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고한 희생을 기억하는 체코인들
1969년, 카를 대학교 학생이었던 얀 팔라흐가 이곳에서 ‘체코여! 다시 깨어나라!’ 외치며 분신자살을 시도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얀 팔라흐의 후배였던 얀 자이츠도 그곳에서 똑같이 분신자살 한다. 바츨라프 동상에서 아래로 조금만 내려가면 자유에 대한 의지를 굽히지 않았던 이들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기 위한 추모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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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벳 혁명', 민주화의 열기가 가득했던 곳
1989년 11월, 인권 운동가였던 바츨라프 하벨은 반체제 연합인 ‘시민 포럼’을 조직해 공산 독재 체제를 무너뜨리며 체코슬로바키아의 민주화 시민 혁명을 주도하였다. 같은 해 12월, 하벨이 대통령으로 선출됨으로써 40년간 지속하여 온 공산정권은 무너지고, 체코-슬로바키아는 새로운 전기를 맞이한다. 이 과정을 '벨벳 혁명'이라고 부른다.
부드러운 벨벳같이 큰 유혈 충돌 없이 부드럽게 혁명이 진행되는 것을 두고서 불렀던 것으로 '신사 혁명'이라고도 불렸다. 벨벳 혁명 당시 70만 명의 국민들이 모여 체코의 민주화를 열망했던 장소가 이곳, 바츨라프 광장이다.
출처 commons.wikimedia.org/wiki/File:Wenceslas_Square_in_2019.09.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