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와 함께 이탈리아 최대의 문화 도시인 피렌체. 어디를 가도 훌륭한 문화유산이 잘 보존되어 있어 전 세계 관광객들이 모여든다. 이러한 피렌체를 만든 데에는 메디치 가문의 공이 컸다. 피렌체와 뗄 수 없는 관계, 메디치 가문을 소개한다.
메디치 가문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난 조반니 메디치는 직물 교역을 하다 조그마한 은행을 시작했는데 수완이 좋아 금융업조합 회장까지 역임했다. 금융계 실세가 된 그는 대중과 소통하며 정계에 진출, 기부 천사를 자청하며 귀족들에게 인기를 얻었다. 실세 통치 세력이 되어 13-17세기 피렌체공화국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던 가문이 되었다. 피렌체는 물론 토스카나 지방까지 세력을 넓혔고 4명의 교황과 2명의 여왕을 배출했으며 13살 꼬마 미켈란젤로의 재능을 알아보고 후원하는 등 많은 예술가들을 지원했다.
출처 www.themedicifamily.com/Giovanni-di-Bicci-de'-Medici.html
은혜 갚은 메디치
요한 23세, 교황이 되다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경쟁으로 교황청이 로마와 아비뇽으로 분열되어 있었고, 2명의 교황이 존재하고 있었다. 이를 통합하기 위해 피사에 모여 합의를 했지만, 오히려 제3의 교황인 알렉산더 5세가 선출되어 교황은 3명으로 늘어났다. 이때, 1년 만에 알렉산더 5세가 서거하면서 요한 23세가 교황이 되었다.
요한 23세의 몰락
3명의 교황이 존재하게 되면서 종교적 분열이 일어나자, 이를 해결하기 위해 로마 제국 황제인 시지문드가 1414년에 독일의 콘스탄츠에서 종교 회의를 열었다. 시지문드 황제는 세 명의 교황을 강제 폐위시키고, 마르틴 5세를 교황으로 선출했다. 요한 23세는 교황에서 폐위됨과 동시에 감금되었으며, 종교적 타락, 전임 교황인 알렉산더 5세를 독살했다는 혐의를 받아 거액의 벌금을 물어야 했다.
의리와 신용을 보여준 메디치
메디치 은행은 자신들의 장기고객이었던 요한 23세의 벌금을 내주었고, 요한 23세는 석방되었다. 메디치 가문은 석방이 되었지만, 빈털터리에 갈 곳이 없는 요한 23세를 거두어주기까지 했다. 이러한 이야기가 알려지면서 메디치 은행의 의리와 신용을 높이 사게 되었고, 유럽 명문 귀족들과 교황이 주거래 은행으로 지정하면서 유명해졌다.
출처 www.themedicifamily.com/The-Medici-Bank.html
예술의 역사, 메디치 가문의 흔적
메디치 은행은 전 유럽을 통틀어 가장 부유하고 훌륭한 은행이었다. 축적된 부를 가지고 이탈리아 전역, 아니 유럽 전역에까지 영향력을 미쳤다. 로렌초 디 메디치 때 피렌체는 유럽의 경제, 문화 중심지로 급부상한다. 이때 적극적인 후원을 받은 예술가들 가운데에는 우리에게도 유명한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등등이 있다. 조반니 디 비치는 ‘비너스의 탄생’을 그린 유명 화가 보티첼리의 대표적인 후원자였고, 코시모 디 메디치는 필리포 브루넬레스키를 후원하여 피렌체 두오모의 쿠폴라를 건축하게 했다. 그 외에도 갈릴레오 갈릴레이, 마키아벨리 등 우리 인류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위인들의 뒤에 메디치 가문의 손길이 닿아 있음을 알 수 있다.
출처 www.timetravelturtle.com/uffizi-florence-venus-medici/
보고 싶다면 피렌체로 와라
피렌체 사람 중 메디치의 덕을 보지 않은 사람이 없다 할 정도로 자선사업과 예술, 다방면에 영향을 준 메디치 가문은 안타깝게도 혈통을 잇지 못해 몰락한다. 가문의 마지막 후손인 안나 마리아 루이사는 메디치 가문 소유의 예술품과 건축물을 피렌체에 기증하며 ‘단 하나의 작품도 피렌체 밖으로 유출해선 안 된다’고 조건을 걸었다. 피렌체로 반드시 가야 할 이유가 하나 더 생긴 것이다.
출처 www.themedicifamily.com/Anna-Maria-Luisa-de-Medici.html
메디치 가문의 흔적, 피렌체 명소
르네상스 회화의 걸작들을 만날 수 있는 곳
우피치 미술관
메디치 가문의 사무소였던 건물로 지금은 메디치 가문이 200여 년 동안 수집한 르네상스 회화 2천 5백여 점을 전시하는 미술관이 되었다. 미술관의 가치는 역사가 증명해준다. 프랑스 대표 화가 샤갈이 피렌체로 와 자신의 자화상을 기증하겠다고 한 일도 있었고, 제 2차 세계대전 중 적군이 그 가치를 알고 폭격을 취소하기도 했다. 지금은 작품명을 달지 않은 미술관이 없지만, 당시에는 관람객의 편의를 배려한 최초의 미술관이기도 하다.
출처 media.triple.guide/titicaca-imgs/image/upload/v1565318362/468ff2de-7faf-44c8-9f38-fe5ff1f38d7f-1232610.jpg?id=566609
피렌체 권력의 본산이었던 곳
베키오 궁전
광장에 있는 베키오 궁전은 메디치 가문이 사용하던 곳으로 피렌체 공국의 청사로 시작해 아직도 시청사로 사용 중이다. 메디치 가문의 라이벌인 피티 가문이 만든 궁전을 매입해 이동하면서 ‘오래된’이라는 뜻의 이탈리아어 베키오를 붙였다. 내부의 하이라이트는 '500인의 방(Salone dei Ciquecento)'으로 메디치 가문이 연회를 열던 곳이다.
출처 shutterstock.com
메디치 가문의 전용 성당
산 로렌초 성당
메디치 가문의 전용 성당이라 하기엔 초라한 모습에 의아하다. 피렌체에서 가장 오래된 성당인 데다가 미완성되어서다. 그렇다고 지나친다면 후회할 일이다. 도나텔로의 청동 설교단과 미켈란젤로가 만든 메디치 가문 묘소의 조각들은 어느 미술관과도 비교할 수 없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노트도 소장한 라우렌치아나 도서관도 함께 둘러보자.
출처 commons.wikimedia.org/wiki/File:San_lorenzo_Facciata.JPG
메디치 가문이 잠든 곳
메디치 예배당
산 로렌초 성당의 확장 건축물로, 16세기부터 17세기에 걸쳐 조반니 디 메디치의 설계를 기초로 하여 니제티가 건축하였다. 메디치 가문의 묘소로도 사용되는 곳으로 군주의 예배당과 미켈란젤로가 만든 신 성구실로 구성되어있다. 돔 아래 벽면마다 대공들의 무덤이 있는 팔각형의 예배당은 각국에서 공수해온 수백 종류의 대리석과 보석들로 장식되어 화려하다.
출처 commons.wikimedia.org/wiki/File:Basilica_di_San_Lorenzo_e_Cappelle_Medicee_(15175811393).jpg
메디치 가문 명소 모아보기
- 우피치 미술관관광명소피렌체(피렌체 두오모 주변)
- 베키오 궁전관광명소피렌체(피렌체 두오모 주변)
- 피렌체 산 로렌초 성당관광명소피렌체(피렌체 두오모 주변)
- 메디치 예배당관광명소피렌체(피렌체 두오모 주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