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번째 방콕, 가서 뭐해요? 🇹🇭
by. 메이제이
LETTER. 04
방콕에서 온 편지
06.OCT.2022

아홉 번째 방콕, 그리고 코로나

2019년 10월. 또 ‘방콕'이었다. 익숙한 동네에 숙소를 잡고, 평범하다 못해 조금은 지루하기까지 한 시간을 보낸 아홉 번째 방콕 여행. 그리고 그해 겨울, 지독한 바이러스가 세상에 나타났고 무려 3년 동안 방콕에서의 평범한 날들을 그리워하게 만들었다.
그동안 많은 게 변해있었다. 열과 성을 다했던 회사의 프로젝트는 사라졌고, 나는 방황하며 구직시장을 전전했다. ‘일 문제로 힘든 건 알겠는데…'라며 자주 말다툼을 했던 남자친구와는 헤어졌고, 10여 년 넘게 살았던 마포구를 떠나 먼 동네로 이사했다.

마스크 속에 숨긴 것들

나름 많은 노력을 했던 3년이었다. ‘적당함'을 유지할 수 있는 회사로부터 안정감을 얻고, 연애에 쏟는 감정을 나에게 집중했다. 자주 가는 장소와 동네를 옮기면 이전과 다른 내가 될 수 있지 않을까 내심 기대도 했다. 하지만 여전히 불안해했고, ‘무리하지 않고 적당히 하면 된다'는 새로운 역할에 적응하기가 힘들었다. 그리고 이런 마음들을 마스크로 꼭꼭 숨기며 살았다.
그러다 야외에서 마스크를 벗을 수 있게 되었을 즈음. 문득 ‘나다움'이라는 세글자가 내 안에서 툭 하고 올라왔다. ‘나답게 잘살고 있나?’ ‘이게 정말 나다운 건가?’ 며칠 후 회사를 정리하고, 방콕행 비행기표를 끊었다. 🛫

니가 바이크를 탔다고?

도착 다음 날, 아침 일찍 일어나 Factory Coffee에서 라떼로 아침을 때우고 책을 읽었고, 리모델링을 한 모던한 로컬 스파에서 첫 손님으로 마사지를 받았다. ‘아, 모든 게 순조로워!’
그런데 예상치 못한 변수가 발생했다. 아속역으로 이동하기 위해 휴대폰을 열었는데 철석같이 믿고 있던 그랩이 좀처럼 잡히지 않았다. 요즘은 그랩보다 볼트를 더 많이 쓴다는 정보를 얻고 급히 볼트를 다운받았지만 상황은 마찬가지. 아쉬운 대로 바이크 서비스를 이용했는데 (바이크는 그랩 볼트 모두 여전히 잘 잡힌다) 다음엔 택시가 잘 잡혀도 바이크를 타고 싶을 만큼 빠른 속도와 스릴에 반해버렸다!
처음엔 쫄보처럼 드라이버의 옷깃을 잡고 탔는데 가만히 둘러보니 나만 드라이버를 붙들고 있다. 시트 좌우, 혹은 뒷면에 손잡이가 있다는 걸 뒤늦게 발견한 이후에는 한 손으로 휴대폰을 보는 여유까지 부리며 바이크를 즐겼다. 지인들에게 이 일화를 전했더니 하나같이 휘둥그레. 내가 바이크를 탄다는 게 그렇게 놀랄 일인가!?

이것 봐. 넌 할 수 있어!

이번 여행의 숙소는 아속역 인근. 언제나 다정하게 여행객들을 반겨주는 요가원 Yogatique Bangkok가 있기 때문이다. 한창 여행객이 많았을 때 비하면 시간표는 꽤 단촐해졌지만, 가격은 변함없이 500바트. 1+1 티켓이라 사실상 수업을 2번 들을 수 있는 착한 금액이다. 이전에 비하면 수업 인원이 많지 않아, 이곳의 마스터인 민과 눈인사를 나누며 대화하는 여유까지 생겼다.
- 어디에서 왔니? - 한국에서 왔어요. - 오, 한국! 내 이름 ‘민 로우'를 한국어로 쓰고 있는 거 알고 있니? (*민은 캐나다 출신이다) - 그럼요! 인스타그램에서 봤어요. 3년 전에도 이곳에서 선생님의 수업을 들은 적 있는데 그때보다 머리가 더 짧아지셨네요? - 맞아. 지난 3년 동안 방콕을 찾는 사람들 줄었고, 내 머리는 더 짧아졌지. 더 중요한 건 그사이 난 더 늙었다는 거야.
수업이 끝난 후 민이 도넛을 먹고 가라며 불러 세웠다. 태국은 물론 캐나다, 미국, 중국, 한국에서 온 수련생들이 모였다. 말도 잘 통하지 않는, 언제 또다시 만날 줄 모르는 찰나의 인연이었지만 1시간 남짓 함께 호흡을 나누었다는 것만으로도 친밀한 유대감 같은 게 느껴졌다.
다음 날 다시 찾은 Yogatique. 어째서인지 한국에서는 시도조차 해보지 않았던 무서운 자세에 도전하게 됐는데 얼떨결에(?) 성공해 나조차도 어리둥절해했다.
- 이것봐. 넌 할 수 있어! 나지막히 지켜보던 민이 말했다. Yogatique Bangkok에는 새로운 나를 만나게 하는 특별한 무언가가 있다.

열 번째 방콕, 가서 뭐해요?

“방콕가서 뭐해요?”라고 물으면 때때로 답하기가 곤란하다. 잘하지도 못하면서 “요가해요"라고 하면 괜히 으스대는 것 같고, 실상은 아이 쇼핑이나 문구류가 다인데 “쇼핑해요"라고 말하기도 조금 멋쩍다. 그러다 가까워진 사람들에게는 ‘나 겁 많은거 알지?’하고 운을 떼는데, 사실 나는 방콕처럼 혼자 가기 안전하면서도 지루하지 않은 도시를 아직까지 발견하지 못했다. (물론, 비교할 만큼 많은 나라를 경험하지도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나의 방콕 여행에는 언제나 비슷한 서사가 있었고 나는, 그 익숙한 반복을 기꺼이 즐기고 있었다. 열 번째 방콕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비우고 다시, 돌아간다

홀로 잔뜩 긴장한 채 목적지에 도착하면 잘 도착한 것에 안도한다. 뜨거운 한낮에는 바삐 움직이는 시장 한가운데 서서 ‘더 열심히 살아야지' 하고 쓸데없이 어깨에 힘을 주다가, 여행이 끝날 무렵에는 ‘빡빡하게 사는 것 만이 꼭 좋은 삶인가?’ 하며 고개를 갸웃거리게 된다.
그러다 요가와 마사지로 몸과 마음을 가볍게 비우고 나면 카페에서 들려오는 세련된 음악, 태국어에서 느껴지는 특유의 부드러움, 식당이나 스파에서 나오는 차의 맛까지 더 섬세하게 느껴진다. 그렇게 비우고 한국에 돌아가면 또다시 무언가에 매진하고, 싫지만은 않은 긴장을 쌓아가며 열심히 잘살고 있다고 안도한다. 나다움을 잃지 않게 하는 이 고단한 루틴 속에. 여행, 그리고 방콕이 있어 참 다행이다!



🧳 여행자 '메이제이'
요가와 소설책, 식물 키우기를 좋아하는 콘텐츠 기획자. 특히, 혼자 떠나는 여행을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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