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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0월. 또 ‘방콕'이었다. 익숙한 동네에 숙소를 잡고, 평범하다 못해 조금은 지루하기까지 한 시간을 보낸 아홉 번째 방콕 여행. 그리고 그해 겨울, 지독한 바이러스가 세상에 나타났고 무려 3년 동안 방콕에서의 평범한 날들을 그리워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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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많은 게 변해있었다. 열과 성을 다했던 회사의 프로젝트는 사라졌고, 나는 방황하며 구직시장을 전전했다. ‘일 문제로 힘든 건 알겠는데…'라며 자주 말다툼을 했던 남자친구와는 헤어졌고, 10여 년 넘게 살았던 마포구를 떠나 먼 동네로 이사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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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름 많은 노력을 했던 3년이었다. ‘적당함'을 유지할 수 있는 회사로부터 안정감을 얻고, 연애에 쏟는 감정을 나에게 집중했다. 자주 가는 장소와 동네를 옮기면 이전과 다른 내가 될 수 있지 않을까 내심 기대도 했다. 하지만 여전히 불안해했고, ‘무리하지 않고 적당히 하면 된다'는 새로운 역할에 적응하기가 힘들었다. 그리고 이런 마음들을 마스크로 꼭꼭 숨기며 살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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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야외에서 마스크를 벗을 수 있게 되었을 즈음. 문득 ‘나다움'이라는 세글자가 내 안에서 툭 하고 올라왔다. ‘나답게 잘살고 있나?’ ‘이게 정말 나다운 건가?’ 며칠 후 회사를 정리하고, 방콕행 비행기표를 끊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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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착 다음 날, 아침 일찍 일어나 Factory Coffee에서 라떼로 아침을 때우고 책을 읽었고, 리모델링을 한 모던한 로컬 스파에서 첫 손님으로 마사지를 받았다.
‘아, 모든 게 순조로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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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예상치 못한 변수가 발생했다. 아속역으로 이동하기 위해 휴대폰을 열었는데 철석같이 믿고 있던 그랩이 좀처럼 잡히지 않았다. 요즘은 그랩보다 볼트를 더 많이 쓴다는 정보를 얻고 급히 볼트를 다운받았지만 상황은 마찬가지. 아쉬운 대로 바이크 서비스를 이용했는데 (바이크는 그랩 볼트 모두 여전히 잘 잡힌다) 다음엔 택시가 잘 잡혀도 바이크를 타고 싶을 만큼 빠른 속도와 스릴에 반해버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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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엔 쫄보처럼 드라이버의 옷깃을 잡고 탔는데 가만히 둘러보니 나만 드라이버를 붙들고 있다. 시트 좌우, 혹은 뒷면에 손잡이가 있다는 걸 뒤늦게 발견한 이후에는 한 손으로 휴대폰을 보는 여유까지 부리며 바이크를 즐겼다. 지인들에게 이 일화를 전했더니 하나같이 휘둥그레. 내가 바이크를 탄다는 게 그렇게 놀랄 일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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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여행의 숙소는 아속역 인근. 언제나 다정하게 여행객들을 반겨주는 요가원 Yogatique Bangkok가 있기 때문이다. 한창 여행객이 많았을 때 비하면 시간표는 꽤 단촐해졌지만, 가격은 변함없이 500바트. 1+1 티켓이라 사실상 수업을 2번 들을 수 있는 착한 금액이다. 이전에 비하면 수업 인원이 많지 않아, 이곳의 마스터인 민과 눈인사를 나누며 대화하는 여유까지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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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디에서 왔니?
- 한국에서 왔어요.
- 오, 한국! 내 이름 ‘민 로우'를 한국어로 쓰고 있는 거 알고 있니? (*민은 캐나다 출신이다)
- 그럼요! 인스타그램에서 봤어요. 3년 전에도 이곳에서 선생님의 수업을 들은 적 있는데 그때보다 머리가 더 짧아지셨네요?
- 맞아. 지난 3년 동안 방콕을 찾는 사람들 줄었고, 내 머리는 더 짧아졌지. 더 중요한 건 그사이 난 더 늙었다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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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이 끝난 후 민이 도넛을 먹고 가라며 불러 세웠다. 태국은 물론 캐나다, 미국, 중국, 한국에서 온 수련생들이 모였다. 말도 잘 통하지 않는, 언제 또다시 만날 줄 모르는 찰나의 인연이었지만 1시간 남짓 함께 호흡을 나누었다는 것만으로도 친밀한 유대감 같은 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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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다시 찾은 Yogatique. 어째서인지 한국에서는 시도조차 해보지 않았던 무서운 자세에 도전하게 됐는데 얼떨결에(?) 성공해 나조차도 어리둥절해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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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것봐. 넌 할 수 있어!
나지막히 지켜보던 민이 말했다. Yogatique Bangkok에는 새로운 나를 만나게 하는 특별한 무언가가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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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콕가서 뭐해요?”라고 물으면 때때로 답하기가 곤란하다. 잘하지도 못하면서 “요가해요"라고 하면 괜히 으스대는 것 같고, 실상은 아이 쇼핑이나 문구류가 다인데 “쇼핑해요"라고 말하기도 조금 멋쩍다. 그러다 가까워진 사람들에게는 ‘나 겁 많은거 알지?’하고 운을 떼는데, 사실 나는 방콕처럼 혼자 가기 안전하면서도 지루하지 않은 도시를 아직까지 발견하지 못했다. (물론, 비교할 만큼 많은 나라를 경험하지도 않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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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도 그럴 것이 나의 방콕 여행에는 언제나 비슷한 서사가 있었고 나는, 그 익숙한 반복을 기꺼이 즐기고 있었다. 열 번째 방콕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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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 잔뜩 긴장한 채 목적지에 도착하면 잘 도착한 것에 안도한다. 뜨거운 한낮에는 바삐 움직이는 시장 한가운데 서서 ‘더 열심히 살아야지' 하고 쓸데없이 어깨에 힘을 주다가, 여행이 끝날 무렵에는 ‘빡빡하게 사는 것 만이 꼭 좋은 삶인가?’ 하며 고개를 갸웃거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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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요가와 마사지로 몸과 마음을 가볍게 비우고 나면 카페에서 들려오는 세련된 음악, 태국어에서 느껴지는 특유의 부드러움, 식당이나 스파에서 나오는 차의 맛까지 더 섬세하게 느껴진다. 그렇게 비우고 한국에 돌아가면 또다시 무언가에 매진하고, 싫지만은 않은 긴장을 쌓아가며 열심히 잘살고 있다고 안도한다. 나다움을 잃지 않게 하는 이 고단한 루틴 속에.
여행, 그리고 방콕이 있어 참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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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행자 '메이제이' 요가와 소설책, 식물 키우기를 좋아하는 콘텐츠 기획자. 특히, 혼자 떠나는 여행을 좋아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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