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한 미식가' 처럼, 싱가포르 출장 여행 🇸🇬 🍽
by. 윤대리
LETTER. 35
싱가포르에서 온 편지
14.DEC.2023

대리님이 가셔야 돼요


어느 날 이사님이 말씀하셨다. 해외 바이어들과 직접 미팅할 수 있는 기회가 있는데, 1인 항공권을 지원해 주는 사업에 우리 회사가 선정이 되면 ‘대리님이 가셔야 돼요’라고. 솔직히 안 될 거라 생각해서(사장님, 죄송) 코웃음 치며 확정되면 다시 말씀하시라 했건만. 이게 웬걸, 선정 업체 10개사 안에 당당하게 들고 말았다.

'고독한 미식가'의 고로상처럼

그렇게 정해진 출장지는 싱가포르. 문화‧예술 탐방이나 유적지를 사랑하는 나는 깨끗하고 잘 사는 도시 국가 싱가포르에는 지금껏 별 관심이 없었다. 게다가 2박 3일의 출장 일정 내내, 아침 9시부터 저녁 5시까지는 바이어 미팅 일정으로 꽉 차 있었으니.
큰 기대도, 관광할 여유도 없었지만 나는 그나마 허락된 시간이라도 알차게 싱가포르를 즐겨 보기로 했다. 근무 중 자투리 시간을 이용해 미식을 즐기는 <고독한 미식가>의 고로상에 빙의해 특히 음식을 중심으로.

야쿤 카야토스트

첫날 일정을 시작하기 전, ‘야쿤 카야 토스트’를 맛보기 위해 아침 일찍 호텔을 나섰다. 내가 간 지점은 조금 썰렁한 쇼핑몰 안에 있었는데, 이 식당 앞에만 현지인과 관광객이 섞여 줄을 서고 있었다. 가장 대표적인 세트 메뉴를 선택. 재료도 비주얼도 무척이나 평범해 보였는데, 입에 넣는 순간 이거 뭔데 이렇게 맛있지 하는 의문이 들 정도로 맛있었다. 탁하고 진해 보이는 커피도 달달함이 아주 녹진했다. 현지인들은 아침 식사로 즐긴다고 하는데(그래서 오픈 시간도 매우 이르다) 내 입맛에는 당 충전이 필요한 늦은 오후에 더 생각날 맛이었다.

송파 바쿠테

바이어들과의 미팅을 후딱 끝내고 나는 다들 입을 모아 추천해 준 식당으로 향했다. 혼자였기 때문에 여러 메뉴를 시키고 싶은 욕심을 내려놓고 대표 메뉴인 바쿠테(돼지 갈비탕)만 주문했다.
국물을 한술 뜨는 순간, 띠용! 외국 국물 요리에 감동받기 쉽지 않은데, 한국인의 소울을 울리는 깊은 맛이 놀라웠다. 생각보다 양이 많지 않아 밥과 삼겹살 & 막창 조림까지 추가로 시켰다. 막창 조림은 잡내가 날 수도 있어 살짝 긴장했지만 너무나 깔끔했고 완벽한 밥반찬이었다.

가든스 바이 더 베이

해가 질 때쯤 되어서야 겨우 피곤한 몸을 이끌고 자유시간을 즐길 수 있는 빠듯한 일정이었지만 전혀 섭섭하지 않았다. 싱가포르는 어두워져야 그 진면목을 드러내는 나라였기 때문이다. 내가 머문 중앙 지역(Central Region)이 싱가포르에서도 가장 번화한 곳인 데다, 고도가 평탄해서 ‘마리나 베이 샌즈’가 어디서든 살짝살짝 보이는 게 그 화려한 분위기에 한몫한 듯했다.
반짝반짝한 야경에 반해 나는 ‘가든스 바이 더 베이’에서 첫날을 마무리하기로 했다. 매일 저녁 7시 45분, 8시 45분에 진행되는 조명쇼도 꼭 보고 싶었다. 쇼가 시작되자마자 소나기가 지나갔지만, 흥겨운 음악에 맞춰 색색으로 빛나는 25~50m 높이의 슈퍼트리들이 격하게 환대해 주는 것 같았다.

라우 파 삿

순식간에 마지막 날이 됐다. 저녁에 어디를 가 볼까 찾다가 두 장소가 눈에 띄었다. 둘 다 내 취향에 맞게 최소 100년 이상의 역사를 자랑하는 공간들이다. 바로 ‘라우 파 삿’과 ‘롱 바’. 19세기에 지어진 랜드마크 ‘라우 파 삿’ 한켠에는 노점상들이 늘어선 사테 거리가 있다.
저녁 7시 땡하면 3차로나 되는 넓은 차도를 가로막고 테이블과 의자들이 설치된다. 왁자지껄하게 떠들며 사테를 즐기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는 혼자였지만 꿋꿋하게 맛과 분위기를 즐겼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뾰족한 빌딩숲 한가운데에, 낮게 자리 잡고 사테 굽는 연기를 자욱하게 내뿜는 라우 파 삿의 풍경은 그 자체로 장관이었다.

롱 바

아일랜드에선 기네스를, 포르투갈에 가면 포트 와인을 맛봐야 하는 것처럼, 나라 이름이 붙은 술이 있다는데 애주가로서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싱가포르 슬링이 처음 개발된 곳인 ‘롱 바’는 싱가포르의 국보급 호텔인 래플스 호텔 안에 있다.
고풍스러운 내부는 100년의 역사가 고스란히 느껴져 마치 시간 여행을 하는 듯했다. 무료 안주로 제공되는 땅콩을 먹고 그 껍데기는 그냥 바닥에 버리는 독특한 전통도 있다. 분홍빛의 칵테일 싱가포르 슬링은 과일 주스처럼 상큼하고 달달하면서도 살짝 도수가 높은 편이었다.

배는 불렀지만...

짧은 만큼 빡빡했던 싱가포르 출장 일정이 모두 끝났다. 배는 부르지만, 낮의 싱가포르를 제대로 즐기지 못한 아쉬움을 남기며 다음 번엔 꼭 관광객으로, 누군가와 함께 오겠다는 다짐을 했다.



🧳 여행자 '윤대리'
책을 만들고 파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scroll-top-button
나를 아는 여행앱, 트리플
예약부터 일정까지 여행이 더 쉬워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