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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부터 한국에서도 혼밥, 혼술, 혼영이라는 말이 흔해졌다. 독서실처럼 칸칸이 나누어진 라멘집은 한국인들에게도 익숙한 풍경이 되었고, 1인 메뉴도 많아져 혼자 밥 먹는 사람도 새삼스럽지 않다. 하지만 그래도 혼자 술집 문을 여는 일은 여전히 좀 부담스럽다. 괜히 사연 있는 얼굴을 하고 칵테일이나 위스키 바 같은 데를 가야할 것 같은 느낌이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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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에 살았던 십 몇년 동안 ‘혼자'의 달인이 되었다. 누군가와 시간을 조정하고 취향을 맞추는 것이 어색해질 정도로, 밥, 술, 영화, 쇼핑, 캠핑과 여행, 각종 서류업무는 물론 집 구하기와 이사까지를 혼자 했고, 그 중 가장 잘하게 된 것은 혼술. 자타공인 전문가가 되었다. 아마도 밥 먹은 횟수보다 술 마신 횟수가 많아서 그랬겠지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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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 시절 살던 도쿄의 기숙사 근처에 ‘사카에 栄’라는 가게가 있었다. 매일 저녁에 자전거를 타고 그 앞을 지나가면 뭔가 튀기거나 볶는 맛있는 냄새가 솔솔 풍겨나와 항상 냄새를 킁킁 맡았다. 하지만 간유리가 끼워져 내부가 보이지 않는 가게의 미닫이 문은, 외국인 여학생이 혼자 열고 들어가기에는 너무 크고 높았더랬다. 어느 비오는 날, 가게 밖에 나와 담배를 피우고 계시던 주인 아주머니와 눈이 마주쳐 인사를 하게 된 것을 계기로 나는 ‘사카에’에 발을 들이게 되었고, 그 날부터 나의 새로운 도쿄 라이프가 시작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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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 아주머니 이름이기도 한 ‘사카에'는 그날 그날 들어온 좋은 재료로 안주를 내는 동네 술집이었는데, 아침에 신선한 식재료가 들어오면 너덧가지 메뉴를 정한 뒤, 흰 A4용지에 붓글씨로(사카에씨는 서예를 오래 배우셨다) 멋들어지게 써서 벽에 붙인다 - “오늘의 메뉴". 요즘 한국에도 오마카세가 유행한다는데, 진정한 오마카세란 이런 것이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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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은 생맥주와 보리 소주, 네댓가지의 일본술과 사와 종류. 사카에씨가 서 있는 카운터 뒷 벽에는 단골들이 키핑한 25도짜리 진로 댓병들이 각자의 이름이 쓰인 목걸이를 건 채로 늘어서 있었는데 차가운 잔에 담긴 생맥주나 하이볼, 각종 사와가 한 잔에 4-500엔, 마카로니 샐러드, 전갱이 튀김, 꽁치구이, 감자 크로켓이나 찬 두부 요리, 삶은 가지콩과 주먹밥 등은 늘 있는 메뉴이고, 때에 따라서는 참치회나 방어회, 뿔소라, 단새우, 중국식 가지볶음 등이 준비되었다. 이 다양한 메뉴들이 500-1000엔을 넘지 않는 가격이라, 퇴근하는 길에 들러 간단히 저녁과 맥주 한 잔을 하려는 동네 주민들이 손님의 대부분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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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집이라고 하기엔 소박하고, 밥집이라고 하기엔 아까운, 끼니도 해결하고 술도 마시고 언제든 가면 누군가가 있어 대화도 나누던 아지트 같은 곳. 이런 술집 겸 밥집이 도쿄에는 정말 많다. 신주쿠나 시부야 같은 관광지에도 있지만, 급행 전철이 서지 않는 한적한 역 근처 혹은 주택가 곳곳에 숨어서, 늦은 시간까지 단골들의 이야기로 불을 밝히고 있다. 같은 자리에서 십 몇 년씩 장사를 하는 주인장들은 술도 만들고 요리도 하면서 동네 사람들의 안부를 전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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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술집에서 홉피*를 처음 마셔 보았다. 어른들의 맛이라는 소바유와리*나 오유와리*도, 큰 컵에 술과 탄산수, 매실 장아찌를 하나 턱 넣어주는 우메보시 사와*도 처음 마셨다. 우라메뉴*라는 말도 배웠다. 긴 카운터 자리에 앉아 사카에씨가 재료를 손질하고 솜씨좋게 튀김옷을 입히고, 볶음 국수를 담아 가츠오부시를 올리는 것을 보며 일본요리의 조리법을 곁눈질로 배웠고, 항상 갓 지은 고봉밥에다 슈퍼에서 산 김치를 낫토와 함께 내 주시던 사카에씨 덕분에 즐겁게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그런 밤에는 유학생활의 두려움과 불안도 조금은 가벼워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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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시작한 나의 혼술의 역사는 계속 이어져, 도쿄 생활 중에 수많은 술집들을 방문했다. 더러는 친구와, 대부분은 혼자. 학교 밖의 친구들은 대부분 술집에서 만들었다. 옆자리 손님, 바텐더, 사장님, 알바생 등등. 그렇게 도쿄의 북쪽과 남쪽, 동쪽과 서쪽의 미세한 문화 차이를 알게 되었고, 다양한 술과 안주 이름으로 일본문화 공부도 했다. 옆자리 손님들의 수다를 들으며 학교에서 보다 훨씬 많은, 더 쓸모 있고 살아있는 단어들을 배웠다. 가게 단골 손님들의 취향에 따라 나도 80년대 노래들을 따라 부르고, 70년대 배우들을 좋아하게 되었다. 학교에서보다 더 넓고 깊게 일본을 배웠다. 대부분은 취해서 잊어버렸지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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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술러가 되기에 가장 큰 허들은, 혼자 술집 문을 여는 바로 그 몇 초간일 것이다. 일단 문을 열고 들어가 앉아서 주문을 하고 마시기 시작하면, “별 거 아니네, 편하고 좋네"가 되고, 그러다보면 옆자리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게 될 수도, 바텐더와 친해질 수도 있다. 낯선 여행지에서의 혼술은 더 매력적이다. 일행이 있다면 모국어로 수다를 떨다가 끝나겠지만, 혼술이라면 억지로라도 그 도시의 로컬들과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되니까. 그 나라의 언어를 하고 못하고는 전혀 상관이 없다. 술이 통역을 해 준다.(프로 혼술러의 말이니 믿어 보세요) 나의 방대한 도쿄 혼술일지는 동네 술집 ‘사카에'에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날 사카에씨와 대화를 나누고 그 술집으로 걸어들어간 일이 일본 생활에서 가장 잘한 일 중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아, 도쿄 가고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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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아두면 쓸모 있는 일본 술 이야기 *홉피 : 1948년 처음 개발된, 맥주 맛이 나는 병 음료수. 맥주가 비쌌던 시절에 대체재로 맥주 맛이 나는 홉피를 소주와 섞어 마시기 시작했는데, 요즘에는 맥주에 들어있는 ‘퓨린체’가 통풍의 원인으로 지목되면서 맥주를 피하게된 중년이상의 남성들이 많이 찾는다. “홉피세트"를 시키면, 홉피 한 병과 소주가 반 정도 담긴 맥주 잔이 같이 나온다. 섞어 마시면 알콜 도수가 높은 맥주 맛. 남은 홉피가 있다면 소주만 추가해서 한 잔 더 마시면 된다. 일본인 친구가 있다면 “아저씨 같애!”라는 핀잔을 들을 수도.
*오유와리 : 위스키나 일본 소주를 찬 물에 섞어 마시는 것을 “미즈와리水割り", 따뜻한 물에 섞어 마시는 것을 “오유와리お湯割り"라고 한다. 겨울에 마시면 몸이 뜨끈뜨끈.
*소바유와리 : 보통 소바집에서 많이 주문하는 방법. 메밀 소바를 삶은 따뜻한 물이 보온통에 담겨 나오는데, 일본 소주에 섞어서 마신다. 걸쭉하고 뜨끈한 소주맛. 이게 뭐지? 하지만 마시다보면 중독되는 이상한 맛. 역시 아저씨들이 좋아하는 맛.
*우메보시 사와 : 소주에 탄산을 섞은 종류의 술을 ‘사와'라고 한다. 보통 레몬사와, 자몽사와, 매실사와 등이 있는데, 반찬으로 많이 먹는 매실 장아찌(우메보시)를 통으로 넣어 주는 우메보시 사와는 보통 30-40대 샐러리맨들의 회식에 어울리는 술. 머들러로 우메보시를 조금씩 짓이겨 가며 섞어 마시면 숙성된 매실향과 함께 느껴지는 쓰고 짭짤한 맛이 일품이다. 어른의 맛.
*우라메뉴 : ‘뒤'라는 뜻의 ‘우라'와 ‘메뉴'가 합쳐진 말. 메뉴판에는 써 있지 않지만 슬쩍 부탁하면 만들어주는, 단골들만의 특권 메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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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행자 '라이링' 아는 것과 하는 것 사이의 시차를 줄이려고 노력하는 직장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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