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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아, 네가 나중에 돈 벌어서 아빠 저기 보내주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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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월에 다녀온 그 여행의 장소는 일본 교토였고 일정은 4박 5일이었다. 4박 5일이라는 시간이 한 사람의 일생에서는 얄팍한 시간일 수도 있겠지만, 그 여행을 다녀온 사람이 아빠와 나 이렇게 두 사람이라는 점에서는 도톰한 시간이었다. 이 여행은 나에게 어릴 적부터 쌓인 시간이기도 했는데, 그것은 TV에 일본의 풍경이 나올 때마다 아빠가 했던 말 때문이었다. "아빠가 은행 다닐 때 저기 가봤는데, 저기 진짜 좋은데. 한 번 더 가고 싶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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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여기서 끝났다면 나로서도 '그런가 보다.' 하고 말았겠지만 그 말 뒤에는 꼭 "아들아, 네가 나중에 돈 벌어서 아빠 저기 보내주라."라는 말이 따라 나오곤 했다. 효심이 가득한 어린아이였다면 그 말에 "네, 제가 돈 많이 벌어서 꼭 보내드릴게요!"라고 대답했겠지만 나는 어린이였음에도 곧바로 '아빠라는 사람이 자기가 돈 벌어서 아들 보내줄 생각은 안 하고 아들더러 보내달라고 하네.'라는 흥칫뿡이 들곤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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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기다리던 첫 사람은 아마도 아빠일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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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아빠는 "내가 이 얘기 해줬었나?" 하면서 이미 열세 번 정도 했던 말을 열네 번째 하는 사람인데, 그래서 나는 TV에 일본이 나올 때마다 '아빠가 또 보내달라는 말 하겠네.' 싶어서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곤 했었다. 아빠가 일본 얘기를 많이 하는 것도 이유는 있었다. 아빠는 IMF가 터지기 전까지 은행원이었고 일본 출장을 많이 다녔었다. 덕분에 나도 엄마 손을 잡고 공항으로 아빠를 마중 나갔던 기억이 여럿 있다. 자아가 생기고 기억이 생기고 내가 기다렸던 첫 사람은 아마도 아빠일 것이다. EXIT이라고 적힌 출구를 통해 수많은 모르는 얼굴들이 나올 때, 내가 아는 단 하나의 얼굴, 우리 집의 큰 남자가 나오길 기다렸던 기억. 그때의 나는 너무도 어려서 아빠가 돌아왔다는 안도보다는 숨은그림찾기에 성공한 작은 신남이 더 컸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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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쯤 지나서 아빠와 단둘이,
더 잘 후회하기 위해 떠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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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 시절로부터 20년쯤 지나서 아빠와 단둘이 공항에 있게 되었을 때, 공항에는 여러 가족의 모습이 보였다. 어린 자녀와 함께 온 젊은 부모, 엄마와 나란히 선글라스를 낀 대학생 딸, 노부모를 모시고 온 어른들. 아빠와 아들인 우리. 배낭여행이나 자유여행과는 달리 가족여행은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 가는 것 아닐까. 자라나는 자식에게 더 넓은 경험을 시켜줄걸, 부모님이 더 늙기 전에 좋은 구경시켜드릴걸, 함께할 시간이 있을 때 더 많이 더 자주 다닐걸. 이런 후회들을 하지 않기 위해서, 아니 어쩌면 더 잘 후회하기 위해서 가는 것 아닐까. 훗날 지금을 돌아볼 때 그때 가길 잘했어, 그때라도 가서 다행이지, 그때 안 갔으면 아마 못 갔을지도 몰라 하면서 말이다. 돌아보면 마음 아픈 추억이 아니라, 이따금 돌아보고 싶은 시절을 만들기 위한 여행, 하고 싶은 후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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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와 단둘이 여행을 다녀왔다는 소식을 주변에 전하면 "대단하다, 아빠랑?"이라며 효자라는 반응도 쉽게 보인다. 그럴 때마다 나는 겸손을 떨면서도 4박 5일 동안 수없이 들었던 아빠의 "내가 이 얘기 해줬었나?"라는 말을 떠올린다. 여기서 포인트는 "했었나?"가 아니라"해줬었나?"라는 끝말이다. 이 끝말은 아빠의 성격을 단적으로 보여주는데, 그가 말하는 '이 얘기'는 자신의 발화를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유익한 정보나 재미있는 사연을 제공하고 싶은 순박한 마음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 여행의 다른 사람이었던 나로서는 물어보지 않은 내용을 자꾸자꾸 말해주는 아빠 때문에 귀에 피가 날 뻔도 했지만, 듣고 나면 쏠쏠한 부분들이 많아서 멋쩍게 귓불을 긁적인 적이 많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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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다녀온 지도 어느덧 3년이 지났고 아빠는 더 이상 일본에 보내달라고 말하지 않는다. 이제 나에게 남은 것은 아빠의 순박한 표정들뿐이다. 처음 먹어보는 메뉴가 맛있다고 싹싹 긁어먹는 모습, 뜨거운 온천 속이었지만 시원하다며 지그시 눈을 감는 모습, 막 글자를 배운 아이처럼 한자 간판을 소리 내 말하는 모습, 같이 오지 못한 가족들에게 줄 선물을 고르는 모습, 별것 아닌 길에서 사진 찍어달라고 말하는 모습. 그리고 그 모습들은 내가 혹시 아빠가 되었을 때나, 또 다른 여행과 우연 속에서 감동하게 될 때 자아낼 도톰한 순박함일 것이다.
그런데 제가 이 얘기 해줬었나요?
후회하지 않는다고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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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행자 '태재' 아담하고 씩씩한 글을 씁니다. 매일 운동하고 매달 수업하고 매년 만듭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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